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스페인 서쪽에 위치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프랑스 국경도시 생장피에드 (Saint-Jean-Pied-de-Port)에서부터 이 도시까지 이어지는 산티아고 도보 순례길의 종착지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자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모두 흩어졌는데 열두 제자 중 야고보는 스페인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한다. 7년 후 그는 고향인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순교를 하게 되는데 순교하기 전 야고보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스페인 땅에 묻히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묻혀진 자리가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다가 800년이 지난 후 한 은둔자가 계시를 받아 야고보의 유해가 묻힌 장소를 알게되었다. 그 은둔자는 계시에서 알려 준 위치를 찾아가 조사를 실시하였고 결국 야고보의 무덤을 발견하게 된다. 이후 기독교인인 스페인 왕은 이슬람에게 정복되어 있는 이베리아 반도를 탈환(레콩키스타)하기 위해 야고보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성당을 건립하게 된다. 성당을 건립하자 기독교 군은 계속 연전연승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야고보는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추대되기에 이른다. 또한 도시와 성당의 이름을 성인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인 ‘산티아고(Saint Diego)’로 부르게 되었다. 도시와 성당의 정식 명칭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int Diego de Compostella)’인데 이는 ‘별(stella)이 반짝이는 벌판(campus)’이라는 뜻이다.
중세 유럽의 수도사나 기독교 신자들은 성지순례를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것이 큰 로망이었다. 그러나 셀주크 투르크가 이스라엘 지역을 포함한 중동지역을 장악하게 되자 성지순례가 어려워지게 된다. 그리하여 대안으로 찾게 된 순례지가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무어인들에게 국토의 대부분을 정복당해 있던 스페인이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을 시작하는 시발점이기도 한 도시이다.
2016년 9월 말 딸아이가 대학 2학년을 마치고 잠시 휴학을 하면서 40일간의 여정으로 홀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 프랑스 생장 피에드포르(St.Jean Pied de Port)에서 출발하여 산티아고까지 800km의 길을. 순례길의 마지막 100km 남긴 지점인 사리아에서 아이 엄마가 혼자 날라가 딸과 합류하였다. 언어도 안통하는 스페인을 혼자서 비행기와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면서 딸과 약속한 장소에서 극적으로 회후하였다. 인터넷의 힘과 엄마의 집념을 확인할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그런데 만나서 동행을 하던 3일째 되던 날에 아이 엄마가 무릎에 이상이 생겼다. 걷기가 힘든 상황이었는데 길 가에서 주은 나무지팡이에 의지하여 일주일만에 겨우 겨우 종착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다. 고생끝에 종착지인 대성당 앞에 도착한 두 모녀의 벅찬 감격의 순간을 그림 속에 넣어보았다. 그림 좌측에 배낭을 메고 있는 딸 아이와 지팡이를 짚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스페인 동북쪽에 위치한 바르셀로나의 랜드마크 사그라다 파밀리아(성 가족) 성당의 완공이 이제 머지 않은 것 같다. 1926년 성당 공사 중 노면 전차에 치여 사망한 가우디의 사망 100주기인 2026년을 목표로 마지막 공정을 밟고 있는 중이다.
이 성당은 1866년 기계화와 근대화로 점차로 타락해져 가는 도시민의 삶을 정화할 수 있는 길은 ‘신의 집’을 건립하는 것 뿐이라는 한 출판업자의 신념에서 출발하였다. 그래서 그는 도시민들이 가족처럼 모여 기도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의 ‘성 가족 성당’이란 이름의 성당을 짓고자 하였다. 성당의 주제는 가장 성스러운 가정인 예수, 마리아, 요셉 세 사람의 가족을 대상으로 삼았다. 성당건축위원회에서는 이 성당의 설계를 처음에는 건축가 빌랴르에게 의뢰하였다. 그러나 바르셀로나 교구에서 건물을 너무 싸게만 지으려 하는 바람에 빌랴르는 설계할 의욕을 상실하고 포기하게 된다. 빌랴르는 자신을 대신해서 제자인 가우디를 추천하게 된다. 가우디를 통하여 공사비를 절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교구는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가우디가 공사를 맡으면서 기존 빌랴르가 설계했던 초기안이 폐기되고 가장 이상적인 성당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가우디는 ‘성 가족 성당’을 통하여 제대로 된 카탈루니아의 정신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복잡한 가우디의 안은 교구의 만성적인 적자로 이어지고 이는 공사를 종종 중단시키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느리게 진행된 공사는 오히려 가우디에게 종교적인 상징을 완벽하게 설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가우디는 1882년에 시작하여 가우디가 사망한 1926년까지 43년 동안 모든 정열을 쏟아 부었다. 3개의 파사드(정면)에 동쪽은 ‘탄생’의 파사드, 남쪽은 ‘영광’의 파사드, 서쪽은 ‘수난’의 파사드라고 이름을 붙이고 파사드마다 4개씩 총 12개의 종탑을 설치하여 12사도를 상징하도록 설계되었다. ‘성 가족 성당’의 정면이 될 동쪽의 '탄생'은 하늘을 찌를 듯한 4개의 포물선 형태의 첨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첨탑을 이루고 있는 돌 하나하나는 예수의 탄생을 의미하는 정교한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탄생의 파사드에는 예수의 탄생과 유년기의 이야기들이 조각되어 있으며 파사드의 중앙 문은 사랑, 오른쪽은 믿음, 왼쪽은 소망의 문으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가우디는 겨우 첨탑이 빠진 탄생의 파사드만 완성한 채 1926년 전차사고로 7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슬픔에 빠진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가우디를 시장(市葬)으로 치르고 천재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성자들만 묻힐 수 있다는 ‘성 가족 성당’의 지하에 가우디를 안장하도록 하였다.
가우디의 사망으로 한동안 중단되었던 공사는 1953년부터 재개되었다. 가우디가 완성한 동쪽의 탄생의 파사드 반대편 서쪽의 수난의 파사드에는 스페인의 현대 조각가 수비라치가 예수의 수난의 모습들을 조각해 놓았다. 이 성당은 전적으로 후원금과 입장료 수익으로 지어지는데 공사중인 상태에서도 매년 100만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이 성당을 찾는다고 한다. 성당이 완공된다면, 예수를 상징하는 중앙 첨탑 높이가 172.5 m로 독일에 있는 울름 대성당 높이 161.5 m를 뛰어 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당이 될 예정이다.
2023년 현재 입장료가 1인당 15유로(탑을 이용할 경우 19.5유로)의 성당의 입장료를 생각하면 이 건물 하나가 벌어들이는 입장 수익만 해도 한 해 수백 억 원에 달한다. 가우디의 사망 100주기인 2026년에 완공을 하게되면 생전에 43년을 공사한 것을 포함해 공사기간이 무려 144년이나 된다.
공사중인 상태임에도 무수한 관광객들을 불러들여 바르셀로나를 먹여 살리고 있으니 바르셀로나로서는 애써 빨리 완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바르셀로나는 이 성당 외에도 가우디가 설계한 건축물이 도처에 산재해 있어 바르셀로나 전체가 가우디의 작품 전시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우디라는 걸출한 건축가가 있기까지에는 가우디의 가치를 알았던 성당건축위원회의 공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술가의 가치를 인정할 줄 아는 도시야말로 진정한 문화도시이고 그러한 도시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음을 바르셀로나를 통하여 새삼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