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고비아 알카사르
세고비아(Segovia)는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북서쪽 60km 지점에 있는 과다라마산맥 기슭 해발 1,000m의 바위산에 건설된 도시이다. 이 도시에는 BC 700년 무렵부터 이베리아인이 거주하였고 BC 1세기 말에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11세기에 이슬람인들의 침입으로 도시가 파괴되었으나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10세(1221~1284)는 이곳을 왕국의 수도로 정하여 도시가 크게 번성하였다. 16세기 초에는 카를로스 1세와 자치도시 주민(코무네로스)들의 싸움으로 도시 대부분이 폐허로 변하였으나 곧 재건되어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 도시에는 로마시대부터 중세시대의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어 고풍스러운 도시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세고비아에 남아있는 중세 건축물 중 대표적인 건축물이 알카사르(Alcázar)라고 불리우는 성이다. 로마시대부터 군사 요새로 사용되었던 이 성은 세고비아 서쪽 시내를 끼고 흐르는 에레스마강과 클라모레스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80m의 망루와 궁전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움직이는 다리를 지나 성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14세기 중엽 처음 성이 건축된 이후 수세기에 걸쳐 카스티야 왕들의 거주지로 사용되었는데 이곳에 살던 왕들이 저마다 증축과 개축을 거듭하였다. 스페인을 최고의 전성기로 이끌었던 16세기의 펠리페 2세가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하였다. 16~18세기에는 알카사르 일부가 감옥으로 이용되기도 했으며, 19세기에 화재로 불탄 것을 복원했다고 한다. 이 성은 월트 디즈니의 영화 <백설공주>에 나오는 성의 모델이 되었다고 해서 '백설공주 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성의 뒤쪽에는 깎아지르는 절벽이 있어 천혜의 요새가 따로 없다. 그림은 성의 뒤편에서 성을 바라본 모습이다.
세고비아 하면 유명한 먹거리가 있는데 그것은 새끼돼지를 화덕에 구워낸 카스티야 지역 명물 전통요리인 '꼬치니요 아사도(Cochinillo Asado)'이다. 꼬치니요는 어린 돼지를 가리키는 말로 태어난 지 2~3주 정도 된 5kg 정도의 돼지로 만든 구이 요리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 요리는 옛날 스페인에 쳐들어온 아랍인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돼지고기를 못 먹는 것에 착안해 그들을 세고비아에서 쫓아내기 위해 식당들에서 오직 돼지고기만 구워서 판 것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이미 아랍인들은 가고 없지만 오직 돼지 구이를 먹으려고 이 도시를 오는 스페인 사람들도 많을 만큼 유명한 음식이 되었다. 아기 돼지를 흙으로 빚은 질그릇에 넣고 화덕에 구어서 나오는 고기는 껍질이 바삭바삭하며 속살은 촉촉하고 부드럽다. 요리사는 칼이 아닌 접시를 이용해 고기를 자른 후 자른 접시를 바닥에 던져 깨뜨려 버린다. 이유는 새끼돼지의 육질이 그만큼 부드럽고 또한 한 번 칼의 용도로 사용한 접시는 다시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위생적으로 음식을 준비한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라 한다.
중세 도시 톨레도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서남쪽에 위치한 톨레도는 2,9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성곽으로 둘러싸인 둥근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고도(古都)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긴 타호 강이 삼면을 깊은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어 자연 해자(垓字)가 형성된 천혜의 요새 도시이다. 로마시대 말기부터 큰 도시로 성장하였고 서고트 시대에는 왕궁까지 자리잡게 되었다. 이슬람 시대에는 코르도바로 수도를 이전하기 전까지 수도로 사용되었던 도시이기도 하다. 11세기말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을 축출하고 16세기에 마드리드로 궁정을 옮기기 전까지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로 사용되었다. 이에따라 톨레도는 이베리아 반도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의 역할을 하였다. 이 때문에 톨레도는 도시 전체가 역사박물관이 되었고 1986년에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리하여 톨레도에는 로마시대의 원형경기장부터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의 다양한 문화유산이 남아있으며 단위면적당 문화유산이 가장 많은 도시로 알려져 있다.
도시가 암석지대에 건립되었기 때문에 시가지가 좁고 구불구불하며 경사가 심한 곳이 많다. 또한 도시 곳곳에는 화가였던 엘 그레코(1541~1614)의 모습이나 그림을 종종 볼 수 있는데 톨레도에서는 엘 그레코를 톨레도를 가장 사랑했던 화가로 여기고 있는 흔적들이다. 엘 그레코는 그리이스의 크레타 섬에서 태어난 화가로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이다. 그가 스페인에서 활동할 때 ‘그리이스 인’이라는 뜻의 엘 그레코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그는 이 별명을 자신의 이름으로 내내 사용하였다. 30대 중반 에스파냐 궁정화가로서 톨레도에 정착하였고 궁정화가를 그만 둔 이후에도 평생 이 도시에서 생활하며 그림을 그렸던 인물이다.
톨레도를 감싸고 돌아 흐르는 타호 강에는 구시가지로 연결하는 2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북동쪽에 있는 알칸타라 다리는 중세시대에 건립된 산세르반도 성 기슭에 위치해 있고 북서쪽에는 13세기에 세워진 산마르틴 다리가 있다. 이 구시가지의 성벽은 대부분 무어인이나 그리스도교도들에 의해 축조되었지만 서고트족이 축조한 것도 있다.
도시 중앙에 위치한 높은 첨탑의 톨레도 대성당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내부 공간을 지닌 스페인풍의 고딕양식으로 건립되었다. 이 성당은 스페인 카톨릭의 총 본산으로 1227년에 짓기 시작하여 226년만인 1493년에 완공하였다. 또한 이 성당은 화가 엘 그레코의 그림 ‘엘 에스폴리오(옷이 벗겨지는 그리스도)’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우측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알카사르는 서고트 시대 왕궁으로 건립된 것이 여러 시대에 걸쳐 군사요새로 사용되어 왔다. 현재는 군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잦은 전쟁으로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16세기에 고딕과 이슬람의 혼합 양식으로 지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
스페인 최남단에 위치한 알함브라 궁전은 이슬람 건축의 백미로 손꼽힌다. 알함브라는 아랍어로 ‘붉은 성’이란 뜻인데 성곽의 벽이 모두 붉은 벽돌로 마감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가 멸망한 뒤 이베리아 반도는 711년 아랍계 무어인들이 점령하면서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무어인의 우마야드 왕조는 모슬렘에게 점령당했던 이베리아 반도를 되찾자는 기독교세력의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에 무어인들은 수도 코르도바를 버리고 그라나다까지 밀려나 이곳에 그라나다 왕국(1238~1492)을 건설하게 된다.
알함브라 궁전은 11세기에 그라나다의 왕이 성벽과 토대를 지었고, 1333년에 그라나다의 술탄 유세프 1세가 화려한 궁궐로 변모시켰다. 그런데 알함브라 궁전이 화려하게 장식된 시기는 그라나다를 비롯한 이슬람 왕국들이 쇠퇴하던 시기였다. 레콩키스타로 인해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쫓겨나는 상황에서 지어진 것이어서 그라나다 왕국의 황금기의 모습이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세프 1세는 특히 건물의 내부에 온갖 정열을 쏟아 부었다. 붉은 색으로 비교적 단순한 성채를 하고 있는 외부에 비해 그 내부는 화려하기 이를데 없다. 인도의 건축처럼 모든 벽면과 천정이 마치 금세공을 연상케하는 정교한 아라베스크(식물문양이나 기하학문양)로 장식되어 있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의 교리에 따라 내부의 장식을 구체적인 형상이 아닌 기하학적인 문양이나 식물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왕궁의 내부에는 ‘사자의 정원’으로 불리우는 정원이 있는데 12마리의 사자가 떠받치고 있는 분수대의 명칭을 딴 것이다. 이 정원에 면한 아벤세라헤스 방(Sala de los Abencerrajes)의 천정은 모사라베라고 부르는 촘촘이 박혀 있는 작은 종유석 모양의 장식이 뒤덮고 있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아름다운 방과 관련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그라나다의 귀족 가문이었던 아벤세라헤스 가문의 한 장수가 왕이 총애하던 후궁과 사랑에 빠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파티를 가장해서 아벤세라헤스 가문의 청년 36명을 이 방으로 초대하였다. 방에 모인 36명의 청년은 왕이 미리 매복해 놓은 병사들에 의해 모두 몰살시켜 버렸다. 이 때 흘러내린 피가 중정으로까지 넘쳐 흘러 중정 중앙에 있는 12마리의 사자상에서도 붉은 피가 흘러나왔을 정도였다 한다.
그라나다의 무어인들은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던 해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5세의 카톨릭 부부왕에게 이 궁궐을 건네주고 아프리카로 쫒겨나게 된다. 이 아름다운 궁궐을 빼앗기고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넘어 북아프리카로 쫓겨 가야했던 그라나다의 마지막 왕 보아브딜은 이 궁궐을 뒤돌아보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보아브딜은 북아프리카에 알함브라보다는 못하지만 비슷하게 지은 궁궐을 만들어 살다가 죽었는데 남은 평생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을 그리다가 죽었다 한다. 이 궁궐을 차지한 스페인 국왕이나 왕족들은 이 궁궐이 악마같은 이교도 상징이라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워 아랍어라든지 이슬람 상징만 제거하고 대부분을 그냥 둔 채로 그대로 궁궐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기독교인들에 의해 궁궐 일부분이 기독교식으로 새롭게 만들어졌다. 카를로스 5세는 왕궁 중앙에 르네상스풍의 왕궁을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알함브라 궁전이 기독교인들에 의해 함락되자 도시에 살고 있던 이슬람 사람들이 급격히 감소하고 알함브라 궁전은 방치되었다. 지금도 알함브라 궁전 뒤쪽 산에는 동굴 주거에서 생활하는 집시들이 많이 있는데 당시에도 궁전 주변에는 집시들만 살고 있어서 화려했던 이슬람 시절의 이야기들은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워싱턴 어빙이란 미국인이 마드리드 미국 공사관에 임명되면서 1829년 그라나다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그라나다에 머물면서 무어인들의 신비한 전설을 ‘알함브라의 전설’이라는 책으로 출간하였다. 그는 책에서 찬란했던 이슬람의 문화를 자세히 묘사하는 한편 그곳을 점령했던 기독교 세력에게 그곳을 내어주고 떠나야만 했던 무어인들의 비애를 소상하게 그려냈다. 그의 책을 통하여 그라나다를 떠나야만 하는 마지막 무어 왕 보아브딜의 피맺힌 절규와 무어인들의 환상적인 전설과 민담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전세계의 많은 관광객들이 그라나다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스페인 정부에서는 알함브라 궁전을 국가 기념물로 지정하고 지금의 아름다운 궁전으로 되살려 놓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궁전 가장 안쪽에 놓여진 방 한 곳에 이 궁전을 세상에 소개하였던 워싱턴 어빙을 기념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스페인의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인 타레가는 자신의 제자인 콘차 부인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구애를 하였으나 그녀는 타레가의 구애를 거절하였다. 사랑에 실패해 실의에 빠진 타레가는 스페인을 여행하는 도중 그라나다에 들러 이 알함브라 궁전을 둘러보게 되었다. 달빛이 드리워진 이 궁전의 아름다움에 반하기도 하고 그가 사랑했던 콘차 부인을 회상하며 그는 ‘알함브라 궁전의 회상’이라는 곡을 작곡하였다. 이 곡의 연주법인 트레몰로의 기법은 알함브라 궁전의 헤네랄리페 정원의 분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기타의 은구슬이 굴러가듯 같은 음을 연속적으로 빠르게 터치하는 트레몰로 주법으로 연주되는 이 곡으로 인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알함브라 궁전에 대한 동경을 하게되었다 한다.
타레가의 실연의 슬픔과 달빛에 비쳐져 영롱히 빛나는 알함브라 궁전의 모습, 그리고 이 아름다운 궁전을 버리고 떠나야만 했던 무어 왕 보아브딜의 애환을 생각하며 타레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회상’을 다시 들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