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아름다운 성 3
1. 노이슈반슈타인 성
‘백조의 성’으로 불리우는 노이슈반슈타인(Neuschwanstein) 성은 독일 남부 알프스산맥 북쪽 호엔슈반가우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성은 영어로는 ‘new swan rock castle'로서 우리말로 해석하면 "새로운 백조의 석조 성"이라는 뜻이다. 수많은 애니메이션의 모델로 등장하는 이 성은 이 성을 지은 왕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유명하다.
바이에른의 왕이었던 ‘루드비히 2세(1845~1886)’의 부친 막시밀리안 2세는 ‘백조의 성’이라 불리우던 폐성 호엔슈방가우 성을 사들여 고딕 양식으로 개조하였다. 어린 루드비히는 이 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어렸을 적부터 건축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는 15세 때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보고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리벨룽의 반지 4부작(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과 같은 게르만 민족의 신화를 토대로 한 바그너 오페라에 심취했던 그는 게르만 민족의 신화에도 깊게 빠져들게 되었다. 한편 루드비히는 1862년 18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지만 2년 후인 1864년에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된다. 이름뿐인 왕으로 전락된 루드비히는 패배감과 내성적 성격으로 의욕상실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어렸을 때 꿈꾸었던 바그너의 음악에 나오는 중세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현실화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생기를 찾게 된다. 그래서 그는 바그너의 오페라에 등장하는 게르만 민족의 신화를 모두 담을 수 있는 성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 그는 튀링겐의 아이제나흐에 있는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이와 같은 성을 호엔슈방가우 성 맞은편에 지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지역은 지형이 너무 급경사지여서 보통 난공사가 아니었다. 성을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루트비히 2세는 관료들과 마찰을 빚게 되어 정치에서 점점 멀어져 가게 되자 그는 건축에만 열중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궁전을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하고 치엠 호수에 베르사유 궁전을 본딴 궁전을 짓게 하는 등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 때 그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바그너를 불러 자신의 구상에 가담시켰다. 당시 바그너는 막대한 빚을 지고 유럽을 전전하고 있었는데 왕은 그의 빚을 모두 갚아주고 호화로운 건물까지 지어주며 작곡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러나 바그너로 인해 국고가 낭비되어 국민들의 반발을 사게 되자 결국 왕은 바그너를 축출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물 짓는 데에 깊이 빠져버린 그는 노이슈반슈타인 성 외에도 다른 여러 곳에 건축물을 짓게 되면서 수많은 빚을 지게 된다. 결국 왕은 의료진으로부터 정신병자 판정을 받게 되고 왕위에서 퇴위되고 만다. 그리고 퇴위당한 지 3일 만에 노이슈반슈타인 성 북동쪽에 위치한 호수에 빠져 익사체로 발견된다. 처음에는 자살로 결론지었지만, 조사 결과 당시 총리였던 루츠가 국고를 낭비하는 왕을 못 마땅히 여겨 왕을 죽이고 자살로 위장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1892년 완성되었고, 모든 정열을 쏟아 부었던 루드비히는 결국 성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만다. 본인도 이 성에서 2주 밖에 머물지 못했다 한다. 한편 왕은 자신의 성이 관광지로 전락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며 자신이 죽으면 성을 부숴 버리라고 유언했다 한다. 그러나 이 성은 왕이 죽은 후 6주 뒤부터 관광지로 개방되었다. 바이에른을 파산직전까지 몰고 갔던 이 성이 이제는 바이에른의 가장 중요한 관광자원이 되는 역설이 되었다.
2. 슐로스 드라헨부르크 성
독일 쾰른 인근 쾨니힉스빈터(Kὅnigswinter)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성은 스테판 폰 자르터가 1882년에 시작하여 1884년에 고딕양식으로 완공한 성으로 라인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 성은 ‘슈테판 폰 사르테르(Stephan von Sarter)’라는 사람이 건축하였다. 그는 독일에서 태어나 파리 증권가에서 주식으로 큰 돈을 벌었고 이어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 운하의 주주로도 상당한 재력을 가졌던 프랑스인이었다. 슐로스 드라헨부르크(Shloss Drachenburg)는 우리말로 ‘용(dragon)의 성 궁전’이라는 뜻인데 이 성이 있는 언덕 이름이 ‘용의 절벽(드라헨펠스, Drachenfels)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독일 신화에는 용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용의 절벽 주변에는 용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다고 한다. 건물주는 이 성을 이렇게 멋지게 지어놓고는 여기서 거의 살지 않고 파리에서 지냈다 한다. 자식도 없이 죽어서 이 성은 소유권이 여러 사람들에게 넘어가기도 하고 2차 대전 때는 일부가 파괴되기도 하였다 한다. 현재는 쾨니힉스빈터 시에서 매입하여 관광지로 활용하여 시의 주요 수입원이 되고 있다 한다.
3. 호헨촐레른 성
독일 슈투트가르트 남쪽 약 50km 호헨촐레른(Hohenzollern) 산 정상(856m)에 자리잡고 있는 성이다. 이 성은 중세기인 11세기에 처음 세워졌으나 1423년에 스와비아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가 호헨촐레른 가문에 의해 1461년에 다시 복구가 되었다. 호헨촐레른 가문은 독일의 전신인 프로이센의 왕가로서 빌헬름 1세 시대(1871-1888)에는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와 함께 전 독일을 통일하여 통일제국을 이룩하였던 유서깊은 가문이다. 30년 전쟁때인 1634년 카톨릭군의 피난처 겸 합스부르크 가문의 소유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 인근의 대도시들이 생겨나면서 성의 중요성이 점차 떨어지게 되자 1746년부터는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로 남게 되었다. 그러던 중 1846년 프로이센의 황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지시로 재건축을 실시하여 1867년에 완공을 하게 된다. 그 이후로는 프로이센의 마지막 황태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빅터 에른스트(1882~1951)가 거주했다고 한다. 2차대전때에는 소련이 점거하여 잠시 사용하였다가 철수하였다. 1978년에는 지진으로 건물들이 손상되었는데 이후 1990년 중반에 보수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성은 매년 30만명 이상되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유도하는 독일 남부의 유명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